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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 겁외사

기사승인 2024.09.11  09: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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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겁외사]

성철스님은 생전에 산중으로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3천배를 시켰다. 노인이나 병자도 예외가 없다. 절은 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다. 동시에 마음도 낮춰진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성철스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경남 산청에 위치하고 있는 겁외사는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성지이자 명소다. ‘가야산 호랑이’처럼 엄격하시면서도 제자가 지은 돌 섞인 밥을 묵묵히 드셨던 자상한 성철스님. ‘이처럼 일시적인 행복보다 영원한 자유와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던 부처님과 같이 치열했던 성철스님의 구도적 삶과 생생한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 겁외사 일학 주지스님을 만나보았다.

 

   
▲ [사진 = 겁외사]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던 성철스님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를 복구하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여 승가의 수행공동체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절연이속(絶緣離俗)이라는 그 출가적 삶의 지향점을 발원하고 몸소 실천해 나갔던 사람이 바로 성철(性徹)스님이다. 그는 미추와 신분, 선악과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기고 나는 모든 생명들 그 어떤 존재에서나 간직되어 있는 불성,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강조하고 이 불성에 눈을 띄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화두 참선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한 몸짓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남 산청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성철스님은 속명은 영주(英柱),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까지 배운 뒤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늘 ‘영원에서 영원으로(From Eternity to Eternity)’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 의학, 문학 등 동서고금의 사상서를 두루 섭렵했으나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건네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깨닫게 되었다. 그 길로 지리산 대원사로 가서 서장(書狀)을 읽고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라는 무(無)자 화두를 들고 40여 일 동안 불철주야로 정진한 끝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고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이듬해 봄 범어사에서 운봉(雲峯)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4년 만인 1940년(29세)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칠통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시를 읊고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이루었으며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었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을 만들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였다.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쳐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다. 이 결사는 한국불교의 종풍을 바로 세우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살리는 일로서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형식과 질서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해 통영 안정사 골짜기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고 머물렀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가치 아래 물 긷고 나무하며 씨 뿌리고 직무에 임했다.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절문 밖으로는 일절 나오지 않고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에 ‘성철불교’라고 하는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를 확립했으며 1964년에는 도봉산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과 함께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세우고 서원을 발했다. 실달학원은 이 시대에 필요한 도제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 [사진 = 겁외사]

사부대중을 위한 백일법문을 하다
성철스님은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동안거 중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하루 두 시간씩 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 종지는 돈오돈수임을 천명하고 현대 물리학 이론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밝히는 대법석이었다. 성철스님은 ‘열반경’의 말씀을 빌어 중도가 불성이라 하고 이 불성을 바로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했다. 그 견성은 즉 돈오(頓悟),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돈오 이후에는 닦을 것도 없다. 일초직입여래지다. 단박에 미세 망념을 모두 끊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극중죄를 지은 사람도 견성할 수 있다. 철저하게 주체(자아)를 폐기하는 화두 참선을 통해서 성철스님은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더불어 이를 화두 참선으로 실증하자고 설법했다. 26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무르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이며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던 그는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종단의 안정을 가져왔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삭발득도하고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그래이’라는 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큰 침묵 속으로 빠져드셨다. 세수 82세, 법랍 58년이었다. 성철스님은 속인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부처의 길을 택했다.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용기,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철저한 수행, 무소유와 절약의 정신은 바로 ‘우리시대 부처’의 모습이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사진 = 겁외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 겁외사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겁외사는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지은 사찰로 성철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불필스님께서 산청군수의 제안으로 5여년의 세월에 걸쳐 2001년 3월 30일 창건된 사찰로 전국에 있는 8곳의 성철스님 문도사찰(門徒寺刹) 중 한 곳이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 밖의 절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성철스님에 의해 지어졌다. 스님은 만년의 몇 해 동안 겨울철이면 백련암을 떠나 부산의 거처에 주석하였고 그곳을 겁외사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그로부터 사명(寺名)을 딴 것이다.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돌기둥 18개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누각이 있다. 누각 정면에는 지리산겁외사(智異山劫外寺)라는 현판과 뒷면에는 벽해루(碧海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 즐겨 얘기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뜻)’라는 문구로부터 지은 것이라 한다. 누각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중앙에 성철스님의 입상을 비롯하여 커다란 염주·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동상 왼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내부 불단에 석가모니부처를 모셨으며,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려낸 성철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외벽 벽화에는 스님의 출가·수행·설법·다비식 장면 등이 묘사되어있고 대웅전 외의 건물로는 종무소·선방·요사채 등이 있다.
또한 성철스님 동상 뒤편으로는 2000년 10월 복원한 스님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 이영주라는 속명으로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곳으로 모든 건물은 새로 건립된 것이다. 혜근문(惠根門)이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선친의 호를 따서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이름붙인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齊), 왼쪽에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 있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할 때의 방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가사·장삼·고무신·지팡이·친필자료·안경·필기구 등 스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 [사진 = 겁외사]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를 실천할 뿐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교구본사이자 총본산(總本山)인 조계사에서 국장으로 3년동안 소임을 보던 일학스님은 은사스님이자 겁외사의 회주인 원택스님으로부터 겁외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고 고민 끝에 성철 스님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겁외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은사 스님께서 처음 권유를 하셨을 때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권유에 거절하지 못해 결국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비구니 스님이셨던 고모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자연스레 불교를 접하면서 자란 일학스님은 군대 시절 ‘苦’라는 명제로 인해 수행자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고 제대 후 성철스님의 법어집을 통해 수행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 제대후 큰스님께서 계실때 나도 삼천배를 하고 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을까하는 마음에 삼천배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삼천배 기도를 드리는 ‘아비라’라고 하는 커뮤니티가 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아낸 바로 다음날이 삼천배를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천배를 올리기 위해 무작정 버스를 타고 백련암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백련암으로 내려가 매달 정기적으로 3천배를 하는 불자님들과 같이 3천배를 하던 중 2천2백배를 하다가 힘들어 포기하려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만났던 중학교 1년 후배 불자님이 전체적인 3천배 기도 속도를 맞출려고 하지 말고 새벽 예불전까지만 마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다시 용기를 얻어 3천배를 마칠 수 가 있었습니다.” 출가를 고민하던 중에 기도를 마치고 받은 불명 ‘응현(應現)’이라는 이름이 ‘현재의 마음에 응하라’는 큰스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느껴져 성철스님을 생전 22년,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시고 있는 원택스님과의 인연으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수행하는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힘겹고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평상심을 갖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수행입니다. 곧 탐(貪)진(瞋)치(痴)를 버리는 일이겠지요.”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탐욕과 진에, 우치를 삼독이라 했다. “탐(貪)하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진(瞋)하는 것은 병을 만들지요. 치(痴)하는 것은 문제를 만들기 십상입니다. 때문에 탐·진·치를 버린다면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행복은 찾아올 겁니다.” 또한 스님은 불교에서의 완벽한 삶을 ‘하심(下心)’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음을 낮춰 작은 것으로도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또 그것을 위해 진실된 노력을 할 때 비로소 완벽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현재 겁외사는 매달 음력 초삼일법회를 비롯해 방생기도(매달 음력 6일), 능엄주 21독 기도(매주 둘째주 토요일), 600배 기도, 광명진언 기도, 철야참선(월 1회) 등 법회와 기도를 신도들을 비롯해 사부대중들과 함께 봉행하고 있다. 사실 일반인들이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는 것은 무리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조차도 ‘무소유’의 실천에는 고행이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인간에게는 소유욕만큼 억제하기 힘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공유(共有)’의 개념을 개입시키면 소유욕을 억제시키지 못하란 법도 없다. 곧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가 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학스님 역시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를 통해 중생 구제에 여념이 없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어떤 특정한 길이 따로 닦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는 자가 닦으면서 가는 길’이라는 뜻이 있다. 이는 참답게 수행하며 정진한다면 수행자가 가는 길이 곧 부처의 길인 것이다. 이처럼 성철스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지리산의 명찰(名刹)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사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묵묵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있는 일학스님을 통해 겁외사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위없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수 있도록 염원해본다. 

김태인 기자 red39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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